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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란의 다도향기 12] 추사와 완원, 그리고 용단승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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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BCB포럼 조회 12회 작성일 26.09.1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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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서예, 차향으로 맺어진 두 거장의 인연



古文之家 「阮元的简介资料大全」在翁方纲、阮元等人的影响下,朝鲜金石学家、书法家和诗人金正喜(1786-1856)开创了“秋史体”,极大地影响了当代的韩国书画艺术。金正喜以阮元弟子自称,并以此意自号“阮堂”。阮元亦能画,擅画花卉木石,笔致秀逸。 출처: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阮元」참고자료

중국 고문헌에 수록된 완원(阮元) 관련 자료에는 "옹방강과 완원 등의 영향을 받은 조선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 시인 김정희는 추사체를 창시하여 한국 서화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스스로 완원의 제자를 자처해 호를 '완당(阮堂)'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완원은 화훼와 목석 그림에도 뛰어나 필치가 수려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嘉庆十五年(庚午)1810年四十七岁…正月,金正喜造访阮元,阮元以为“非常英物”,延请他至泰华双碑之馆,以稀代名茶龙团胜雪款待,并观赏了《华山庙碑》及《唐贞观造像铜碑》等。二月一日,阮元、朱鹤年、李鼎元、翁树昆、刘华东、李林松等 在法源寺为金正喜设宴饯行。 출처: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 古文之家「阮元的简介资料大全」

이 기록에서는 1810년 김정희가 완원을 방문하자, 완원은 그를 "비상영물(非常英物)", 즉 범상치 않은 비범한 인재라 칭하며 태화쌍비관으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희귀한 명차인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를 대접하고, 「화산묘비」와 「당(唐) 정관조상동비」 등 유명 금석문을 함께 감상하였다. 이어 귀국길에 오르는 김정희를 위해 법원사(法源寺)에서 송별연까지 베풀었다고 전한다.

위의 중국 고문헌은 19세기 초 조선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청나라를 대표하는 경학자이자 금석학자였던 완원(阮元) 사이의 깊은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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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 현재의 베이징)에 간 김정희는 유리창(琉璃廠)을 중심으로 형성된 청나라 학술·예술계를 접하게 된다. 유리창은 서적과 서화, 문방구, 골동품 상점이 밀집한 문화 거리로 학자와 문인, 서예가들이 모여 교류하던 공간이었다. 조선의 연행사들 역시 반드시 들르던 문화 명소였다. 

완원은 유리창에서 만난 젊은 김정희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김정희 역시 완원을 통해 청대 고증학과 금석학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훗날 김정희가 독창적인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고 조선 금석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배경에도 이러한 학문적 교류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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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들의 만남에서 주목할 부분은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이다. 용단승설차는 이른 봄 첫 찻잎을 엄선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귀한 중국 명차로 알려져 있다. 맑고 은은한 향과 깊고 단정한 풍미로 명성을 얻었으며, 오랫동안 황실과 상류 지식인층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귀한 차였기에 김정희에게도 강렬한 문화적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인 1846년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충남 예산 가야사 터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탑 내부에서 용단승설차 네 덩이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전승은 고려와 중국 사이에 차문화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 불교 사찰은 차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중국 명차 역시 외교와 무역, 불교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음을 시사한다.

김정희는 평생 수많은 호(號, 별칭)를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적게는 90여 개에서 많게는 500여 개에 이른다고 전해질 정도다. 이를 뒷받침하듯 최준호 광주대 호심미술관장은 저서 『추사, 명호처럼 살다』(아미재, 2012)에서 추사의 명호 343개를 분류하고 그 유래와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는 추사가 학문과 예술 활동,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류, 유배 생활 등 삶의 다양한 경험을 명호에 담아 자신의 정체성을 다채롭게 표현했음을 보여준다.

그 수많은 호 가운데서도 '완당(阮堂)'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한 아호가 아니라 완원에 대한 존경과 감사,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눈 학문과 예술 교류의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완당이라는 이름에는 연경에서 경험한 용단승설차의 기억과 한‧중 지성 교류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정희는 연경에서 경험한 차의 세계를 조선에서도 이어갔다.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등과 차를 나누며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문화를 이어갔고, 이는 조선 후기 차문화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상과 문화를 나누는 매개체였다. 

돌이켜 보면 완원이 추사에게 건넨 한 잔의 용단승설차는 단순한 차 한 잔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과 청나라를 잇는 문화의 다리이자 학문과 예술, 우정을 함께 나누게 한 상징이었다. 추사와 완원의 만남은 서예와 금석학, 차문화를 통해 더욱 깊어졌고, 그 흔적은 '완당'이라는 이름 속에도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오늘날에도 추사와 완원, 그리고 용단승설차 이야기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차가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어 사람과 문화를 잇는 매개였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00여 년 전 연경에서 시작된 한 잔의 차 인연은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교류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차문화 전문가

운소당‧차문화테라피연구원 원장 英序 조미란

출처: http://www.gb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69373